화평동 세숫대야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인천 주민이었던 내게 묘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드디어 이 나라에... 이 도시에... 저 송도에... 하면서 말이다. 1, 2회 당시 나는 대학 1, 2학년이었고 인천시민이었다. 거리 여기저기에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학과에서 가까운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했다. 드디어 이 나라에... 나는 따로 티켓을 살 돈도 없었고 돈을 달라 할 수도 없었고 돈을 벌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인지, 가고 싶은 건지 안 가고 싶은 건지 몰랐던 건지, 하여튼 나는 안 갔다. 분명히 한번 가보고 싶긴 했는데 당시 나의 경제 관념이 감당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그 펜타포트 금토일 주말에는 인천 집에 있었고 아버지와 냉면을 먹었다. 화평동에 가서. 만두도 먹었고, 아버지의 세차도 도왔다. 그 다음 주에는 다녀온 지인들의 개고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두 해 연속이었다. 두 번째 해에는 냉면집 화장실에서 '아 작년에도 딱 이때 냉면을 먹었고 때마침 저쪽 동네에서 펜타포트를 하고 있었지'했다. 물론 좀 우스웠다. 3회차에는 훈련병이었고, 아마 그 다음다음 해 전역을 하고 만든 노래 같다. 만들며 한받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노래다. 모두 잊고 다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