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서 밤으로

만든 첫 번째 노래다. 그곳은 군대였고, 09년이었다.
기타를 잘 치는 선임이 있었다. 그는 내 기타 선생들 중 한 명이었다. 그와 기타를 꽤 많이 쳤다. 휴게실이나 흡연실에 앉아서 데파페페 따위를. 병 40명인 대대에 기타가 두 대, 기타가능자가 두 명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뭔가 프레이즈를 넣어 보겠다면서 부담 없이 코드 진행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대신 마이너 코드를 쓰려면 상병은 꺾이고서, 라는 농담도 덧붙였다. 나는 그의 말대로 뭔가를 만들었지만, 마이너 코드를 원하는 만큼 썼고, 그에게 들려주지 않았고, 혼자 가사를 붙여보기 시작했다.

그 즈음엔 그 해의 이정표로 삼을 만한 일을 겪었다.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위병소 근무에 나가 경계등을 보며 이것저것을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신병이 아니었다. 선임에게 물을 것도, 선임들이 물을 것도 다 떨어졌다.
만들면서는 먼저 야간근무 투입로를 떠올렸다. 그리고 야간집회를 떠올렸다.
포병이었으니 물론 사격도 떠올렸다. 특히 아주 서정적이고 자극적인 풍경인 야간사격.
지난날 쓰러져간, 사랑했던 이들도 떠올렸다.

'나는 지금 스트로크의 벽을 하나 돌파했다'고 분명히 의식하던 시기에 만들었다. 지금 봐도, 노래를 부르며 하기엔 지나치게 어려운 스트로크였다. 미묘한 박자전환. 당시는 거의 그것만 쳐댔으니 가능했다. 어렵긴 한데 별로 티도 안 나고 신경도 너무 쓰여서 전역 후부터는 그냥 쉽게 바꿔 쳤다. 많지 않은 패턴으로 거의 매일 전력을 다해 기타를 쳤던 그때가 최대의 퍼포먼스를 내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

전역 후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준 노래. 친애하는 P형이 녹음을 해보자고 해서 녹음도 해봤다.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10년의 송년회에서, 각자의 자작곡을 불러 보는 시간에 이것을 불렀다. 치는 도중에 치킨 배달이 왔다. 어쩐지 배달부 앞에서는 노래를 할 수가 없게 되어 간주가 두 배로 길어졌다. 그것은 배달부가 벨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녹음되었다. 그 순간을 기리는 의미로 계속 그렇게 한다.

나중에 추가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붙일 때도 있고 안 붙일 때도 있다. 더 하고 싶으면 붙이고 더 하기 싫으면 안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