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러스가 필요하다

일테면 하드록의 기타 프레이즈가 보컬과 과연 경쟁하는 것이라면, 역시 코러스의 자리를 꿰차려는 것이겠다. 포크의 abab 진행축을 위에서 본 다음 옆으로 돌려놓고 짜부시켜서 늘린 뒤 재생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반대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보컬이 프레이즈를 대체하려고 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노래에는 코러스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메아리, 풍광, 영혼의 거처, 토양이고 날씨고 장소다. 그것은 지역적인 것, 세계적인 것이다. 비슷한 문장을 어디서 본 것 같다.

어쩌면 하나의 노래로부터 코러스를 분리해 다시 노래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코러스가 그러한 노래다. 처음 만든 노래들 중 하나인 종소리의 코러스다. 종소리는 만들고 싶은 대로 계속 만든 노래다. 붙이고 더 붙이고 한번 더 붙이고... 자르고 더하고... 내가 깨달은 것은, 만들고 싶은 대로 계속 만들면 부르기가 너무 힘들어지는 순간을 맞는다는 것, 곧 노래를 계속 영원히 이어서 만들 수는 있겠지만 계속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종소리는 그저 지칠 때까지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내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종소리 다음에 이 노래가 붙어 있는 셈이다. 붙어 있도록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의미상 그렇다는 것이다. 붙어 있다기보다는,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장소적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1축 이상이라면, 우리가 하나의 노래를 들으면서 동시에 다른 노래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런 이야기다. 종소리를 잘게 나눠 부분들로부터 코러스적인 것을 그러모아 만든, 처음부터 끝까지 코러스인 노래다. 장난에 가깝지만, 이런 얘기들은 어쨌든 농담은 아니다.

혁명에 대한 노래다. 나는 이 노래를 백여 명이 함께 부르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나는 이 노래 뒤편의 북소리나, 그보다 더 폭력적인 다른 여러 소리들도 들을 수 있다. 나는 굉장한 돌들로 만들어진 무대에 있고, 객석에 있다. 그런 건 없지만, 그냥 나는 알 수 있다. 내가 혼자서 듣고 있고 혼자서 부르고 있고 아무 소리도 없지만 하여튼 안다. 나는 안다. 종소리의 형편없는 행진으로부터... 그러한 코러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