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남자들에 대해

패륜은 필요한가? 그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지금껏 이중 생각을 그냥 두지 않아 왔고, 그것은 잘한 일 중 하나다. 패륜은 이미 등장한 것이다. 나는 바로 지금 그것을 해결해야 하고, 내가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그것은 인내하는 방식으로 제압할 수 없으며, 그냥 둘 수도 없으며, 거절할 도리도 없다. 일테면, 내가 생각날 때마다 mc무현을 찾아 들으며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저 비밀스런 영역에서 끌어내 적절한 방식으로 설명해내야 하고, 그로부터 윤리와 행동강령을 도출해내야 한다.

세 곡은 저 패륜적인 밈들, 자살자에 대한 농담에 대한 응답 중 하나다.

노무현의 자살은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가, 어떻게 볼 것인가, 생각하면 판단이 정지되어 버린다. 그런 판단 정지가 어쩐지 맘에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둘러싸고서 전방위적으로 그토록 많은 상징들이 그토록 추한 꼴로 채굴되어 공시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성재기에 대한 노래다. 남성-인권이란 것도 남성-연대라는 것도 생소한 단어였다. 남성은(혹은 나는) 인간성과 남성성을 그다지 분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별로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겠지. 그 운동이란, 실재하는 어떤 모종의 억압 덩어리를, 남성으로서 겪는 억압으로 묶어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누려왔으니까 내려놓을 때도 됐지' 하고 말 그런 측면들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운동을 단지 혼란된 전선 긋기의 훌륭한 예, 또는 계급대립에 대한 훌륭한 교란의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려고 햇던 건 그게 아니고... 결론부터 쓰면 남성성이란 것이 인간성과 긴장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에어장은 두 가지 사건이 하나로 섞인 밈이다. 하나는 가족을 찌른 남편이었고, 하나는 불륜 중이던 목사였다. 전자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후자는 화를 피하려다 사고로 추락사했다. 이미지는 전자에서, 이름은 후자에서 끌려왔다. 둘이 섞여 밈이 된 과정조차 현기증이 난다. 그건 착각이면서도 아니었고, 그것은 거의 아름다운 것이었다.